2019-09-13
자라간다는 동사에서 위화감을 느낀다. 오히려 되뇌였을 때 어색하지 않은 건 늙어간다는 말. 똑같이 시간의 앞머리를 보고 나아가는 데도 싱싱함과 바스러짐 정도를 나타내는 수직 좌표가 키를 잰다. 해가 갈수록 비밀이 많아 내 몸이 굽는다.
너는 오늘은 날이 갈수록 내가 더 선명해진다고 보냈다. 다시 너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의 감정은 훔쳐보고 싶은 구석이 있다.「향연」에서 에로스를 결핍에 의한 욕망으로 표현했듯이 그렇게 내게 에로스가 있었다. 그건 당신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순전히 모르는 감정에 대한 욕망으로 있었다. 그들 곁에서 언제나 연인이 아닌 구경꾼으로, 있었다.
이전 연애에서는 이 감정이 사랑이 맞는지 아닌지 끝내 알지 못했다. 당신은 우리의 온도가 너무 다른 것 같아서 슬프다고 했다. 나는 문제점을 정확히 발견하지 못한 채로 방황했다. 내게 로맨틱한 사랑이 남들만큼 없어서? 덜해서? 그것도 아니면 정작 사랑하는 사람과는 만나보지 못해서? 와중에 확실한 것은 외롭다는 감정 혹은 병증이었다. 쉽게 많은 사람과 웃고 떠들고 다니다 더 쉽게 관계를 정리했다. 그러다 별것도 없이 너를 만났다.
술김에 한 말인줄 알았는데 정말 영등포까지 온 건 좀 놀랐다. 너는 호기롭게 장미 한 송이를 사들고 와서는 3시간 동안 내 눈을 못 쳐다봤다. 실물이 더 예뻐요. 말도 안 되게 첫 눈에 반했다고 했다. 우리 집에 와서 나는 술을, 너는 음료수를 마셨다. 카톡할 때랑 분위기가 다른데? 그쪽도요. 사실 더 연락을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네가 하루를 멀다하고 내 집에 찾아와서 있다가는 막차가 끊기고 나서야 택시를 잡아 집에 가는 것이다. 난 그게 싫지 않았다. 그냥 집에 누군가 함께 있는 안정감이 좋아서 가만 두었다. 얼마 안 가 내 생일이 왔다. 너는 늦게 일을 끝내고 와서 미안하다며 케잌이랑 선물 이거저거를 주었다. 자신이 선물을 고르는 데 얼마나 고민하였는지 한탄하다가 땀냄새 나니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모습이 순수하고 투박했다. 나는 웃었는데 너에게 흥미가 생겨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영원히 그럴지도 모른다고도 말했다. 전애인도 안 좋아했어. 좋다고 하면 친구가 제일 좋아. 그런데도 괜찮아? 너는 내게 상관없다고 했고 자신을 이용하라고 했고 그렇게 담벼락에서 맞담배를 피다가 새 연애가 시작됐다.
너는 나를 사랑하고 나는 너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게 우리 관계의 전부였다. 나는 염치 있는 인간이라 네게 함부로 하지 않았고 가끔은 거짓말도 했다. 그러나 사실 너를 옆에 두는 것조차 버거웠다. 첫 애인의 사랑은 집착이라고 나쁘게 넘길 수 있었지만 너는 나를 정말로 사랑했고 나는 그 감정을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었고, 불편했다. 네가 사랑한다, 보고싶다 하는 말들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사랑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시절에 너를 만났다. 너는 내게 불편한 사람이었다.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걸 알기에 너에게 항상 미안했고 그러나 외로웠고 너는 알면서도 나를 만났다. 너는 나의 취향을 좋아했다. 내가 읽는 시집, 쓰는 글, 듣는 음악, 틀어 놓은 영화 같은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
우리는 3개월을 겨우 만났다. 나와 헤어지고 글을 쓰기 시작하던 너는 어느새 글솜씨가 꽤 늘어있었다.